[부활시기] 2015 교구장 부활메시지 (2022)

[서울대교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1베드 1,3 참조)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겨우내 얼어 있던 대지에 다시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피어나는 봄이 왔습니다. 싱그러운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남과 북의 모든 형제자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온 국민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희생된 모든 분들과 유가족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주님 은총의 힘으로 희생자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유가족들은 하루빨리 슬픔을 극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이 만남을 통해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그분을 증거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인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부활하신 주님의 빛과 은총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세계 도처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 전쟁의 위험이 끊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억울하게 희생되고 있습니다. 테러와 전쟁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고귀한 인간성을 말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며 소중한 생명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 물신주의와 생명경시 풍조, 진영논리로 인한 비난과 증오가 날로 증가하여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어렵게 합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새로운 삶으로써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크게 변화되어 그분을 만방에 선포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 곧 새로운 삶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평화의 삶을 각자 삶의 현장에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상태”로서, “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평화의 길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주신 평화는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평화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할 각오를 합시다. 특히 올해는 한반도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남과 북이 새롭게 되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위해 더욱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남한과 북한은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며, 순교자의 피는 남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북한의 형제들이 하루빨리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여 함께 평화의 삶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을 뒤로하고 평화와 화합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고 희생합시다. 우리 각자의 변화 없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요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해 이번 사순 기간에 한국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주도하여 범종교인 차원의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나 자신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쇄신의 기치를 드높여 나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와 같은 훌륭한 실천운동이 각 계층에서 활발하게 이어져 우리 사회가 좀 더 밝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새로워져 자신과 가정만을 바라보는 좁은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여 우리 사회가 하나가 되는 데 힘을 모은다면, 물신주의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와 여러 분열상들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시 생생한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새롭게 변화되어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형성되실 때까지 그분을 닮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어둠 속에 있지 않고, 부활의 빛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가정에 주님 부활의 생명과 빛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춘천교구]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김운회 루카

주교예수님의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온통 깃들길 기도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드렸던 스승님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을 체험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하고 애달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분의 주검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다가와 슬픔을 거두어 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여인의 눈물은 삽시간에 기쁨의 눈물로 바뀝니다. 어두운 얼굴은 스승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셨습니다(마태 16,16).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에는 참으로 끔찍한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어둡고 우울한 슬픔의 바다 앞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세월호 유가족들이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심연 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오로지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곳입니다. 간혹 이곳에서 겪는 삶의 애환 때문에 방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려도 영원한 삶의 가치는 절대로 잃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영원합니다.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 등으로 세상은 시대마다 다른 기준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문화적 영향으로, 주변 환경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위협하고 제한할 때도 있습니다. 법과 제도와 질서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까지 그렇게 폭행을 당해 왔습니다(마태 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선택받은 일꾼’임을 잊지 않습니다. 인간 삶의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며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한결 같으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은 우리의 나아갈 길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8-9).”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품고,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일구며, 시련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로마 8,18).

형제자매 여러분, 지구촌 곳곳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을 일삼으며 사람들 마음에 공포를 조장하는 악의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이럴 때일수록 악마를 대적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1베드 5,8). 서로에 대한 미움과 상처와 분열과 의혹을 극복하여 사랑과 용서와 일치와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대전교구]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유흥식 라자로 주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마태 28,5-6) 우리 모두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비의 시작이자 마침입니다. 창조에서 강생,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 위의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주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상실하고, 집착하며, 분노하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 체험은 신비 그 자체이며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체험은 우주와 인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바라보는 지평을 변화시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죽음만을 보고 세상의 일에 분노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죄와 부족함, 그 한가운데 계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며, 진실로 거짓을 밝게 드러내고, 사랑으로 분노와 증오를 녹이고, 갈등을 품어 안으며 평화를 이루는 힘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신비이며 선물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감사하고 축하하며 세상을 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은 물질적 풍요와 편안한 생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15초마다 충분히 먹지 못해서 죽어가는 어린이가 있으며, 전 세계 부의 소수 집중과 일자리 감소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물질적 빈곤은 자본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에 우선하는 체제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라는 죄의 결과입니다.

엄마가, 아빠가 자녀를 죽이고,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끔찍한 폭행을 저지릅니다. 군대의 폭행, 교수 및 상사의 성추행, 간통, 약물과 도박, 음란물 중독 등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조차 허물어 버립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은 자살 증가, 부정부패, 대형사건 사고로 이어집니다.

윤리가 설 자리를 잃고, 더 강한 힘을 가진 승자가 되려는 목표만이 삶을 떠받치는 축이 되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살인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물질이 정신적 가치를 대신하고 탐욕과 풍요에 밀려 신비와 초월의 자리가 사라진 곳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거부하고, 외로움과 허무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영적 빈곤을 봅니다.

이처럼 죄로 가득 찬 빈곤 앞에 어느 누구도 자신은 빈곤하지 않으며, 이웃과 나의 빈곤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체제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우리 죄가 너무나 큽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무관심했으며, 인성보다 성적을 중시하며 자녀를 교육했고,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원칙을 슬그머니 저버리거나 직위로 타인의 인격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며,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빈곤을 치유할 용기와 힘을 줍니다. 허무와 분노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성령이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어둠 속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희망을 전하며, 내 것을 내주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실천하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으로 분노와 두려움을 거두시고, 창조와 강생,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태초부터 사랑하셨음을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오직 이 사랑만이 영적 빈곤에서 벗어나 윤리적 빈곤을 타파하고 근본적인 물질적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원천적 힘입니다.

교회는 무관심의 바다에 떠있는 섬으로 빈곤에 지쳐 표류하는 이들의 안식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비춰진 우리는 무관심의 고리를 끊고 빈곤에 처한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시는 주님께 응답하며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작은 지체를 우선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기도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성령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 주저함 없이 굳은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삶과 선교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 평신도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평신도는 교회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바로 ‘교회’(「교의 헌장」 32항)라는 분명한 의식을 지니셔야 합니다. 교회는 사제 중심적이며 교계 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로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키고,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평신도의 활동(「평신도 그리스도인」 42항 참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 평신도, 수도자, 사제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상호협력하며 더 열심히 복음을 살아갑시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는 교황님이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땅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가난하거나 그 밖의 사정으로 노예가 된 유다인들을 풀어주었던(레위 25장 참조) 유다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보니파시오 8세 교황님이 제안한 성년제도를 거쳐,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선포한 2,000년 대희년에 이은 특별희년입니다. 로마의 4대 성전 성년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는 희년에 교회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용서하는 가운데 세상과 화해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믿고,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삶을 삽시다. 광복 이후 분단된 한반도, 같은 언어, 같은 형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현실을 희년의 정신에 비추어 보며 우리의 죄를 반성합시다. 우리부터 통일과 화해를 위한 기도에 앞장섭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장한 순교성인들로 하여금 온갖 유혹과 잔인한 고문의 두려움을 이기고 신앙을 증거 할 힘을 주셨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형제애를 실천했던 순교성인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희년을 부활절인 오늘부터 준비합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관심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빈곤을 치유하시며, 우리를 한반도와 세상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앞당기는 신앙의 증거자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인천교구]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대축일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피할 길 없는 불청객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라는 성경말씀대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세 번이나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마태 20, 17-19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사도 바오로는 박해를 받고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사도23, 6참조). 우리의 신앙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참 신앙인이냐 아니냐가 판가름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어렵사리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고, 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한 채 살아간다면, 그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큰 의미를, 인생에 깊은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음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처참히 못 박히셨으며, 무덤에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1코린15, 14 참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희망 없는 끔찍한 패배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위대한 사랑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로마 6, 7-9 참조).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의 영원을 향한 꿈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찌 단박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하지 못했고,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토마 사도는 내 손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나서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활하신 뒤 40일 동안 가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Video) 예수님은 부활 후, 어디로 가셨을까? 00로 가셨다 l with 황중호 베드로 신부 l 부활절 l 예수 승천 l 복음 l 사순시기 l 천주교 가톨릭 상식 [빠다니엘TV ep.15]

지금은 승천하여 성부 오른편에 계시기에 우리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고, 다만 성사 안에서, 복음서를 낭독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에, 죽었던 모든 이들은 부활할 것이고, 살아 있는 이들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재림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던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면 신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화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 없이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로 굳건한 부활신앙을 갖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때에, 설레는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 눈으로 뵙게 될 그날을 그리워하는 것도 우리 믿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오로지 물질에 매몰되어 모든 가치가 그것에 집중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 낙오된 사람들의 절규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온갖 병폐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마치 그 옛날 우리 사회를 일그러지게 했던 양반과 상민 제도를 방불케 하고 있기에 걱정스럽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며 공동선을 외면하는 오늘의 현실을 타파하는 길에 우리가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여 날로 믿음이 성숙하고 주님께 대한 소망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인천교구의 주보이신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과 함께 굳건한 믿음의 길을 걸으며, 부활의 영광을 누릴 희망 속에 기쁜 나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수원교구]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용훈 마티아 주교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2) 그리스도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십니다.3) 그리고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희망의 보증인 부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마르 9,31)이라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절망에 젖어 울고 서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 부활을 그녀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요한 20,11-16). 또한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다가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침통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다가가시어 그들의 희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씀과 성찬을 통해 일깨워주셨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토마스 사도는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 속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주시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토마스의 희망도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십니다(시편 34,19; 119,116 참조).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이사 42,3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둔 모든 이의 희망을 성취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희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로마 8,24 참조).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 곧 영원한 생명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히브 6,19 참조).

절망의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한 세상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어 사회 곳곳에서 슬픔과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되어 중산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추락한 이들의 고통과 불행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져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계파의 논리를 앞세워 자신들의 이권에만 열중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더욱 큰 실망과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직면한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고, 기혼자들에게서도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날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경제활동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사회 진입이라는 위기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10년 연속 자살률 1위, 청소년 사망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OECD Health Data 2014)라는 최근 통계가 말해주듯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든 세대에 걸쳐 심각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곧 1주기를 맞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95명의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9명이 실종된 이 엄청난 참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탐욕과 이기심, 불신과 생명경시 풍조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사고 후 1년이 다되도록 아직도 이렇다 할 참사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손을 놓고 있고,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들은 절망의 슬픔으로 탄식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마치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표징처럼 지금 세월호는 온 국민의 희망과 함께 진도 앞바다의 밑바닥 어두운 곳에 침몰해 있습니다.

언제나 신뢰의 대상은 주님

이러한 우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물리치셨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4)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쳐진 어깨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모든 세력을 이겨내고 부활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높이 올리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필리 2,8-11 참조).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그분께 모든 신뢰와 희망을 두는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8-9 참조). 우리는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1티모 4,10 참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로마 10,13)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을 향해 걸어오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제자들을 진정시키시려고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당신이 참으로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거센 바람이 이는 호수 위를 베드로에게 걸어오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에 몸이 흔들리자 그만 두려운 나머지 바다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라고 청하자, 주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심으로써 믿음으로 청하는 이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죄책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차마 주님께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지 않아 스스로 죽음과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만 것입니다(마태 27,4-5 참조). 이처럼 주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이 곧 멸망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인도에 따라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2). 아무리 거센 두려움의 파도와 절망의 폭풍이 불어 닥쳐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요한 16,33 참조). 그분은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 13,5).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부끄러움이 사라질 것입니다(시편 34,6 참조).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원주교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 6). 김지석 야고보 주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참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와 고통 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지난 사십 일 동안 이어진 주님 수난의 여정에서 우리 자신의 내적인 정화와 회개는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며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참 기쁨이며 참된 진리의 승리를 가르쳐줍니다.

2014년은 진리가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며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해로 불리었고, 일부에서는 의인이 부끄러운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실보다는 거짓이, 상식보다는 몰상식이 만연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진리가 부정되고 가려진 세상은 겉은 농약과 여러 가지 약품으로 모양과 색깔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썩은 과일과 같아 사람을 병들게 하고 상처받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것은 우리도 부활한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거짓과 몰상식에서 진리와 상식 안에서 새 생명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분에게 십자가의 형벌과 죽음을 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쁨이며, 진리가 세상을 이긴다는 참된 신앙을 알려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사순 담화에서 “하느님은 우리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을 통해 진리 안에 걸어가는 이들은 무관심 속에서 걸어가지 않으며, 사랑과 그 행동을 통한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내적 쇄신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교구장 주교로서 저는 2015년 기쁜 마음으로 교구설정 50주년 희년을 맞는 사목교서에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적 성숙과 쇄신의 삶”을 살아가자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기쁨 속에서 우리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끊임없는 내적 성숙과 쇄신이 필요합니다. 내적 성숙과 쇄신의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 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 뿌리를 내리고, 신앙인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진리의 길을 걸어가며, 1차적 도움만을 바라지 않고 본질적인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교구 설정 50주년의 주제를 베드로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권고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 6). 우리가 무엇인가 물질적인 도움만을 원하는 성전 앞의 불구자가 아니라, 인간다우며 본질적인 삶으로 변하는 신앙인으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사도 베드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내적 성숙과 쇄신을 통한 본질적인 삶의 변화는 부활의 삶을 우리에게 지속시킵니다.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우리는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한 해를 보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에 순종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 16, 7)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가신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에도 고통과 어둠과 죽음에서 기쁨과 빛과 생명으로 되살아나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또 다시 사랑과 기쁨을 살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에게 전해진 희망의 빛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은총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과 특히 우리 교구의 세 분 복자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아멘.

[의정부교구] 의정부교구 교구장 2015 부활 메시지 이기헌 베드로 주교

가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어두움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어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럽고 불안한 대상이었던 죽음은 더 이상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삶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생명에로 나아가는 시작’이라고 말하며 또 주일마다 성찬례를 올리면서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고백을 합니다.

(Video) 전국 교구 교구장들의 부활 메시지를 비롯한 다양한 소식 전해드립니다ㅣ가톨릭주간종합뉴스_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진행

부활은 우리 믿음의 절정이며 최종적인 희망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사건 안에는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나가면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고통과 시련이 있으며, 무덤이 의미하는 부패와 불의가 있고, 사악함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인내와 극기를 통해 이루어 졌으며, 무덤의 돌을 치워버리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돌을 치우는 행동은 부활이라는 변화와 새로움을 낳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십자가를 인내로이 짊어지고, 때로는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때 우리는 부활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삶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를 죄로 유인하는 일들 앞에서 때로는 우리 사회 안에서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환경을 망가뜨리는 일이 일어날 때, 때로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윤리 도덕을 어지럽히는 일들에 대해 정의로운 소리를 외치고 여기 저기 널려있는 불의한 돌들을 치우는 일들이야 말로 새로움과 변화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을 산다는 것은 새로움과 변화를 낳게 하는 여정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 이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 신앙 안에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부활은 새로움과 변화의 원천입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들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늘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젊으시고, 새로움의 끝없는 원천이십니다. (복음의 기쁨 11항 참조)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로운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이사 40,31).

새로움과 변화를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애쓰고 적어도 그 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 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복음의 기쁨 3항 참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하며, 성경을 가까이 하며 성경 안에서 말씀으로 때로는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신앙의 새로움, 삶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웃들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요한 1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우리는 크게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무관심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에는 가난한 이들이 특별히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본받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웃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향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제 우리는 우리의 갈릴래아로 갑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신 곳,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찾아오라고 한 곳도 갈릴래아였습니다.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할 땅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땅,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 받는 땅, 인권이 유린되고 생명이 존중 되지 않는 땅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번 한국주교들의 사도좌 방문 때 교황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보이셨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해야 합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북한의 형제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함을 당부하셨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남과 북 모두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기억해야하며, 신자들이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분단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주교단이 권장하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해주시를 바랍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우리의 갈릴래아로 갑시다.

출발합시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대구대교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려면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교형자매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면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지난 사순절 동안 거룩한 전례를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해 온 우리는 이 부활의 아침에 이 지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의 기미를 느낍니다. 그것은 변천하는 세상을 여행하는 우리가 영원한 고향을 그리워하도록, 또 우리 삶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부활을 믿고 바라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인생의 최종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무병장수를 삶의 목표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재물과 명예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최선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 한 번 뿐인 인생을 통해 반드시 이루기를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세상 물결에 휩쓸리거나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수난하고 부활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런 연습의 기회를 자주 만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거룩한 성사들과 전례를 통해서, 또 성경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부활하시어 이제 다시는 죽지 않으시는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한 가지 훈련은 바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들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주님의 모습을 소외된 이들 가운데서 발견하고 그분께 봉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활을 위한 훈련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 남의 짐을 함께 져 주는 것, 내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내어놓는 것을 통해 실제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바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대림 첫 주에 발표한 사목교서에서 올해 교구의 사목 지표를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 정한 바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분께서 이미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시니 지체들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본분이지만, 또한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희생과 봉사의 기회를 통해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은총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교우들 안에 심어주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점점 자라나고 튼튼해져서 마침내 불멸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산교구] 부활절을 맞이하여, 황철수 바오로 주교

부활절을 맞이하여 모든 분들께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빌고 싶습니다.

부활절과 생명이라는 말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흔히들 부활이라는 말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훨씬 더 깊고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우리 모두는 변화할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종말을 맞는 허무한 인생인 것 같지만 실상은 생명으로 변화하는 의미 있는 길을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사랑의 길, 생명의 길을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 같지만 결코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 부활사건이 증언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이 죽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고백은 궁극적으로 죽은 것은 바로 세상의 힘, 권력의 힘, 미움의 힘, 폭력의 힘, 죄악의 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생명을 주고 우리 삶에 진정한 생명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지만 죽음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목표로 하여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그 생명의 길에서 결코 생략할 수 없는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을 통한 충만한 생명의 봄을 기원합니다.

[청주교구]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세 여인은 돌아가신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흰 겉옷을 입은 젊은이의 말을 듣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 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2.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가톨릭교회교리서 638항)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차지하는 핵심적인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특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가 파스카 신비의 핵심부분으로 가르쳐 온 신앙진리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삶을 당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당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2013년 3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들과 함께 시스티나 성당에서 첫 공식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이 미사에서 교황님께서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 위에 교회를 세우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영광으로 고백하고 증언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음으로써 부활을 체험하고 각자의 삶 안에서 그 기쁨과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잘 지내고 편안할 때 곧잘 다른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문제와 고통, 그들이 당하는 불의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교황님께서는 본당과 공동체는 “무관심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돌보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나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기주의가 보편화 되어 있고, ‘나’이외의 것은 관심조차 없는 개인주의가 점점 팽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물질만능주의와 결합되어 ‘인간과 생명’을 경시하고 ‘개인’의 권리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이, 우리 사회의 기초이며 토대인 가정공동체와 부부사랑은 위기 앞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무관심’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관심에 맞서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으로 무관심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릇된 풍조에 맞서 올바른 가치를 존중하고 수호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구 공동체 구성원들은 말씀과 성체 중심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이 바로 부활의 기쁜 소식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Video) 20200411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미사 강론(사목서한)

5.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쳐부수고 부활하셨으며, 풍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부활을 통해 사랑의 길, 기쁨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마산교구] “그리스도 -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의 희망”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15)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 전체를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매우 단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증언에서 자라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부활에 대한 증언을 배제하면,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죽은 것이 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할 때라야 세상과 인간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것이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활 사건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만난 증인들의 증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 앞에 휘청거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경험의 지평을 부수어 버리는 전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부활은 그들을 압도하고 증언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9,9)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의문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묻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사건을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부활 신앙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증언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과 소멸이라는 법칙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서는 사건>입니다. 이 <들어서는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형태의 미래를 열어주는 관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세상을 전제합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금 죽어야만 하는 시신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 - 작은 겨자씨

모든 생명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32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작은 겨자씨는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가장 작은 겨자씨입니다. 무릇 위대하고 힘 있는 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겨자씨는 결국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로마 서간은(10,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백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진리로, 구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고백은 삶이 됩니다. 이 삶은 부활하신 분의 새로운 실존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성립합니다.

우리는 부활 고백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을 코린토 1서 15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15,3) 여기서 복음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따르면, 여러분이 서 있는 토대입니다(15,1참조).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5,2)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믿게 되었습니다.”(15,11)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5,4.8)

부활의 전제 - 죽음

코린토 1서 15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고 자연사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것은 심지어, 그분의 죽음까지도 성경의 성취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와서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을 보증하고 성취하는 사건이 바로 그분의 죽음입니다. 아울러 그분의 죽음 ‘우리의 죄를 위해’돌아가심입니다. 다시 말해‘무엇을 위한’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의 관계 안에 놓이게 되면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으나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해 죽음이라는 운명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원죄의 결과인 죽음과 구별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불손에서 오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겸손에서 오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진리에 역행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로 끌어올리기 위해 인간에게 내려가신 사랑의 완성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봉사로서 화해를 가져다주고 백성을 위해 빛이 되어 주는 죽음입니다.

우리의 다짐 - 부활의 삶

사도 타대오가 스승 예수님께 드린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부활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계기로 삼기를 제안합니다. 해마다 되풀이하는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활이 참으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의 참된 의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타대오는 예수님에게“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묻습니다. 온갖 이유로 나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이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역시 묻고 싶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단지 부활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에도 관련되는 물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무기력하게 드러나지 않게 행하시는 행동 방식은 그분에게만 속하는 하느님만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 지점입니다. 그분은 인류의 장대한 역사 속에 서서히 결코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역사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를 주도하는 권력자들과 온갖 인간적인 가치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철저하게 외면하였고, 처형에 앞장섰습니다. 그분은 고난 받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분으로 당신 제자들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외적인 힘이나 권력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과 사랑을 통해 일깨우는 것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 진실로 위대한 것이 아니던가요? 예수님의 부활이 약속하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안동교구] 부활의 힘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몰아내고 죽음을 이긴 사랑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이 봄의 계절에 단단한 대지와 아스팔트에 콘크리트까지 뚫고 올라오는 놀라운 생명력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생명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 쓰이는 소생(蘇生)이라는 말과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다른 뜻입니다. ‘소생’은 아직 그 생명의 씨앗이나 뿌리라는 근거가 있어서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은 완전히 소멸된 죽음에서 생명이 움터 나오듯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된 실로 새로운 사건, 새로운 창조, 새로운 탄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러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 참조)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처참하고도 절망적인 어둠에서 찬란한 광채의 부활한 생명이 움터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우리도 함께 부활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의미를 더 확장시켜서 당신의 부활 신앙을 이렇게 피력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고질적인 불의와 사악함과 무관심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어떤 것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열매 맺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땅 위에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선이 다시 꽃피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아름다움이 새로 생겨나고 역사의 풍파를 거치며 변모됩니다. 가치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곳에 이 새로운 세상의 싹을 틔웁니다. 그 싹은 잘려도 다시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 역사에 면면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헛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살아 있는 희망의 행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276, 278항)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으니 우리도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부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곳곳에서 부활의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은 바로 ‘부활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자들, 곧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참 신앙인들은 바로 그 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신조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한 12,24 참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씨앗이 되고 그 씨앗으로 생명의 싹을 틔웁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의 뜻보다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놓으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려 합니다. 항상 따뜻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죄인들과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 합니다. 상대방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말 한 마디에도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부활의 힘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결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한다고 믿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필리 4,13)’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꾸준히 말씀에 귀 기울이며 깨어 기도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자기 탓 없이 부활의 축복과 은총, 곧 부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자들, 무분별한 수입개방 정책으로 갈수록 소외 되어가는 가난한 농민들, 온갖 생활고와 병고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소중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억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탓 없이 주님 부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소외되고 착취당하고 고통 받고 권리를 빼앗긴 채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놀라운 힘이 여러분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부활의 놀라운 힘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부활의 힘의 도구로 초대되었습니다. 아직 주님 부활의 혜택을 얻어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 부활의 혜택을 넘칠 만큼 많이 받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서 부활의 빛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부활의 힘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헛되이 부활하지 않았음을 증거 하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오늘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광주대교구]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짙은 어둠을 가르며 새벽을 깨우는 따스한 햇살이 차가운 대지 위에 비추고 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은 어둠의 사슬에 묶여 있던 고통의 침묵을 일깨우며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그 빛은 세상의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주님 부활의 파스카였습니다. 부활은 세상의 어둠 때문에 고통받고 병들어 아파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삶이 선물이며 은혜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안에 영원한 생명의 충만한 기운이 번져나갑니다. 광명의 빛은 죽음의 고통을 딛고 영원한 생명으로 세상에 부활하시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서 기쁨의 환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체험의 여정에 주님께서 모든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저 역시 주님의 이 초대에 응한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도 이 초대에 성실히 응답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의 순례여정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주님께서 원하시듯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가난한 이들, 낮은 자들의 땅이었으며, 천대받고 소외된 이들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자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그러한 갈릴래아 출신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보다 더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 역시 그렇게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리인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당신 제자들, 곧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갈릴래아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소외받는 이들이 머무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사순 시기 담화문을 통해 우리 모두 무관심에서 벗어나 이웃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자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낮은 존재로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낮은 자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이 계신 그 ‘갈릴래아’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우월한 존재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이들은 주님의 사랑의 손길에 자신을 맡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낮은 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가난하고 무력한 낮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교종께서는 이런 무관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기를 촉구하십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삶의 근원적이고도 전반적인 사회의 위기를 재조명하는 기회로, 그리고 이 교훈을 절대 잊지 않기를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억울한 희생과 아픔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사람으로 인식합시다. 가난하고 소외되며 고통과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한 발 더 다가갑시다. 이들과 함께하려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고 감사할 때 우리 안에서 커져 갈 것입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주님의 무덤을 향해가던 여인들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어떻게 치울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무덤 앞에 다다르자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과 억압을 치울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을 낮은 자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은 이웃의 어려운 처지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낮은 자들의 존재와 삶에 무관심합니다. 반면에 자신을 낮은 자로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에 열려 있고, 이웃의 아픔에도 동참합니다. 또한 그 아픔의 원인에 대처하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우리도 어려운 이웃들과 연대하여 그들을 짓누르는 돌들을 치우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읍시다.

이웃이라는 개념이 약해진 요즈음, 공동체라는 말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생소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저 ‘내 것’과 ‘내 일’에만 사로잡힌 이기적인 사람들은 함께 연대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더욱 삭막해지고 아픔과 외로움이 커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배고픈 군중을 위해 너희가 빵을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연대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그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상황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함께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가야합니다. 너 없는 나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가장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리는 본당 공동체입니다. 교종께서도 무관심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본당공동체가 하느님 자비의 섬이 될 수 있길 기원하셨습니다. 우리 교구는 올해부터 본당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으로서 서로 낮은 자가 되어 이웃의 아픔과 시련에 동참합시다. 그래서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돌을 함께 치워줍시다. 어느덧 그들의 돌만이 아니라 내 돌도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더 큰 기쁨과 더불어 함께하는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모든 형제자매님들과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주님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나아가 본당 공동체에도 부활의 은총이 넘쳐 하느님 나라의 체험이 커져가고 이웃들과도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부활 축제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삶의 기쁨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초대에 응답한 이들을 당신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할 때 우리 인생여정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 안에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알렐루야!

[전주교구]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1.“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삶에 무언가 고장이 나고 뒤틀려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하지요. 성서에서는 그런 소망을 간단히 줄여서 ‘새 생명’ 혹은 ‘새로운 삶’이라고 합니다. “새로 난다”는 말을 그대로 쓰기도 하지요(이사 65,18. 요한 3,3.5.7.참조). 니고데모가 생각한 대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빛과 힘으로 정신과 마음이 온전히 바뀌어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거기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솟아납니다.”(복음의 기쁨, 1항). 교황님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누구나 나름대로, 혹은 크고 작고 간에, 이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2.문제는 예수님을 얼마나 깊게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일에는 사다리를 오르듯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당신 자신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비유하셨지요(요한 1,50-51 참조).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만나기 위해서 여러 단계를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을 가까이에서 접촉하고 늘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분을 참으로 만나지는 못했지요. 오늘 미사에서 소개된 요한복음 장면만 해도 결국 그분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조차 여러 단계를 거쳤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특히 열 두 사도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아간 이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기 시작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습니다. 그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사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대부분은 믿지 않았는데 베드로와 요한만 벌떡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예수의 수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같이 보고도 요한은 믿었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Video) 1995년, 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집전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 [옛다 - 추억의 cpbc 프로그램]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3.사도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마리아 막달레나는 계속 무덤을 떠나지 않고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속을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뒤에 어떤 이가 또 보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알아본 것은 “마리아야!”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였습니다. 마리아는 다시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사도들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루가복음 5장과 요한복음 21장을 합쳐 놓고 보면, 베드로는 본래의 직업인 고기잡이에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시작하고 역시 고기잡이로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는 과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잡이 일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두 번 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한 마리도 못 잡은”(루가 5,5; 요한 21,5)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일이 그분의 정체를 깨닫게 하고 그 자신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사울이라 불리던 바오로, 베드로 등 어느 누구를 보아도, 각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거나, 마음속의 고민을 심각하게 느끼며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찾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에 한 걸음씩 다가오시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삶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울증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되돌아보니,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계단은 자신이 밟아 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업고 오르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높이 세워진 십자가는 그분께서 우리 모두를 업고 오르신 사다리였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4.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운 터널들은 그분이 우리의 손을 잡고 참 생명을 향해 이끌어주시는 계단들입니다. 그 과정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마리아!” 하고 부르셨듯이, 그분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이름으로 불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그분을 깊이 만나, 삶이 온전히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는 수많은 터널을 통과한 후 깨달은 베드로 사도의 권고가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이 말의 뜻을 따라 옮기면 “뚫어지게 쳐다 본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뻗치신 구원의 손길. 이 모든 것 이 지금은 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로 적혀 성서라는 책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수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겉모습을 뚫고 속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빈 무덤만 보이다가, 차츰 수의, 천사, 동산지기를 거쳐 부활하신 주님이 보였던 것과 같은 일이 지금 내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 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옛날에 일어난 일이 지금 일어나고, 그들에게 생긴 일이 나에게도 그대로 생기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도 사도들과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제주교구] 2015년 예수 부활 대축일 사목서한 강우일 베드로 주교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으로 만물과 함께 새로운 생명의 축복을 가득히 나누어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전 세계의 모든 교회는 이 부활축제에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물속에 몸을 담그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할 것을 수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되는 우리는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현재의 죽음을 수락하고 미래의 부활을 전망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수락하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이셨올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수락하신 까닭은 당신을 미워하고 모함하고 단죄하고 고발한 사람들을 수락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뜨린 사람들과 맞서 씨움을 벌이지 아니하고 그들의 올무에 걸려 넘어져도 그틀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적으로, 원수로 다루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형제로, 혈육으로 거두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오늘도 많은 이들이 차별과 배척, 증오와 저주, 단죄와 대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고통을 주며 어둠의 포로가 되어 삽니다. 그것은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어도 자기만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여러 정부는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고 소탕하기 위하여 보안에 엄청난 예산과 장비와 인력을 투입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왜 그런 극단적인 전투에 나서는지, 무엇이 그들을 목숨 건 싸움터로 몰아내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해소하기보다는 이미 전투에 나선 사람들만 대적하려 하기에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며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삶을 포기합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노년을 안심하고 살아낼 방안이 안 보이고 함께 해 줄 동반자도 안 보여 삶을 포기합니다. 젊은이를 일자리에서 몰아내고 노인을 외톨이로 몰아내는 것은 끊임없는 경쟁을 통한 탈락과 선발의 사회구조입니다.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만 선발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탈락시키는 무한 경쟁의 사회구조입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갈수록 죽음의 문화를 키워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배제하고 탈락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이 다르고 계층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우리 모두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세상이 다 차별하고 따돌려도 예수님은 한 동기간으로 품어 안아주셨습니다. 당신을 배척하고 제거하려는 사람들조차 형제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나다. 그래서 그들이 쳐놓은 올무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죽음의 문화를 치우고 생명의 잔치를 벌이려면, 예수님과 함께 모든 종류의 적의와 대결의 갑옷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자신이 ‘보수’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과는 달리 ‘진보’에 가까운 사람들도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민이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자신이 ‘진보’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수’쪽에 가까운 사람들도 같은 민족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위해 매일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주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으로 회사를 일구셨습니까? 어떠한 기업도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고, 노동은 자본에 우선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동자는 경영자가 마음대로 부리는 종이 아니라 경영의 동반자입니다.

당신은 박봉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이십니까? 노동의 대가는 금전만이 아니라 이마에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경영자는 척결해야 할 노동자의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당신은 며느리가 자신만 아는 철부지, 게으르고 위아래를 모르는 젊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며느리도 친정 부모에게는 손에 물 묻히게 하기 싫고 언제까지나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귀중한 자식입니다.

당신은 시부모님이 자신만 알고 심술궂고 욕심 많은 노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만나기 전까지 내 배우자를 수십 년 사랑하고 양육하고 공짜로 키워주신 분, 내 배우자가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빚을 지고 있는 분들이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내 안에 죽음을 수락할 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을 위하여 지금 작은 죽음을 거듭 받아들일 때, 후에 주님의 큰 생명을 선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에페 4,32-5,2)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자애와 평화가 여러분 가족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군종교구] 2015년 부활 메시지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어둠을 뚫고 생명의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전후방 모든 부대와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어둠 속의 구원 계획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만드셨습니다.(창세 1,2참조) 또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과월절 밤의 어둠은 구원의 시작이며,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탈출 12,13-14참조) 이처럼 어둠이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품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어둠은 고통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어둠은 인내를 요구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런 어둠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둠으로 끝나 버릴 것만 같은 걱정과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유혹들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며 살아왔습니다.

특히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넘을 수 없는 한계이고 어둠이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의심케 만들었고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의미를 부질없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어둠 속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의 길을 보여주신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의 길을 걸으시면서도, 결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준비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확증시켜주신 사건이며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주신 희망의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어둠을 부활의 빛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의 어둠이 사라지고 생명의 빛이 세상에 들어왔건만(요한 1,9참조), 어둠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어둠은 바로 우리가 만든 어둠이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물질적인 축복을 나눔이 아닌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려는 교만과 욕심, 나와 이웃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으로 억누르려는 언어적 또는 신체적 폭력,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행동들이 지금껏 우리가 만든 어둠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어둠에는 구원과 희망이 있었지만, 우리가 만든 어둠에는 죽음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하며 우리 모두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부활의 빛으로 몰아내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각자가 평화와 빛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올 한 해 우리 교구는 “기도하며 일하며”라는 표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필요하신 말씀을 하시겠지만, 언제나 그 내용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 중에 만나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가 머물고 일하는 삶의 자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일이란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을 더 많이 베풀기 위한 수단이고 세상의 어둠을 복음의 밝은 빛으로 변화시키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천년 전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도 처음에 믿지 않았던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마태 28,17참조) 부활 신앙이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열려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도전과 같은 사건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준엄히 꾸짖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코린 15,12)

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여러분의 군복은 조국을 지키는 평화의 상징이며 동시에 세상의 어두운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빛의 갑옷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어두운 의심을 버리고 부활의 기쁨을 온 세상에 전하는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군종교구민 여러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이 모든 병영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희망하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려 노력하는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하실 것입니다.(마태 28,20참조)

http://www.cbck.or.kr/bishop_msg/bishop_msg.asp?Year=2015&Season=02&x=31&y=10

[서울대교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1베드 1,3 참조) 염수정 ...

이제 우리의 죄와 부족함, 그 한가운데 계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때에, 설레는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 눈으로 뵙게 될 그날을 그리워하는 것도 우리 믿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 속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주시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토마스의 희망도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 앞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또한 우리 삶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를 죄로 유인하는 일들 앞에서 때로는 우리 사회 안에서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환경을 망가뜨리는 일이 일어날 때, 때로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윤리 도덕을 어지럽히는 일들에 대해 정의로운 소리를 외치고 여기 저기 널려있는 불의한 돌들을 치우는 일들이야 말로 새로움과 변화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 남의 짐을 함께 져 주는 것, 내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내어놓는 것을 통해 실제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바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본분이지만, 또한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희생과 봉사의 기회를 통해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은총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음으로써 부활을 체험하고 각자의 삶 안에서 그 기쁨과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무관심’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내 안에 죽음을 수락할 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1베드 1,3 참조)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겨우내 얼어 있던 대지에 다시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피어나는 봄이 왔습니다. 싱그러운 봄과 함께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마태 20, 17-19 참조).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지만 죽음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음으로써 부활을 체험하고 각자의 삶 안에서 그 기쁨과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세상을 전제합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곳에 이 새로운 세상의 싹을 틔웁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 안에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요한 3,3.5.7.참조).

2013 교구장 부활메시지 [서울대교구]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온 마음으로 믿고, 그 부활을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신앙의 해’를 살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구 설정 50주년이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분과 깊은 친교를 이루어 참된 희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기쁨을 우리 민족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를 당신 사랑 안에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6.8).. 우리는 ‘말씀’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특별히 ‘신앙의 해’를 맞아 우리 신앙인들이 재발견해야 할 신앙의 여정이 바로 이것이라고 교회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생명의 빛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은 변화된 삶을 통해 부활을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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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Barbera Armstrong

Last Updated: 07/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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